일상을 담다

깨알 점에 웃는 가을

LO송이VE 2023. 10. 24. 05:49

"오후에 시간 되니?" 친정 언니의 전화다.

형부는 집집마다 벼 추수로 한창이고 언니는 밭작물 수확에 바쁜 몸이다.

구십 넘은 시아버님이 옆에서 거드는 게 편치 않아 여동생을 부른 것이다.

대추 수확을 마무리 짓고 여유가 나는가 싶어도 시골 일이란 게 끝이 없다

특히 밭작물은 손이 많이 가고 힘이 든다.

거뜬한 몸으로 겁 없이 척척 해내던 밭일도 나이 들면서 겁이 난단다.

그 마음을 알기에 주저 없이 언니네 들깨밭으로 간다.

 

대추밭 하우스의 옆에 들깨 털 준비가 되어있다.

파란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망사멍석을 깔았다.

도리깨는 없고 나무 막대기와 사과를 담는 박스를 엎어놓았다.

아침 일찍 이슬로 젖은 들깻단을 옮겨놓았단다.

잘 마른 들깨는 살짝 건들기만 해도 우수수 소리가 난다.

수북하게 쌓인 들깻단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나무막대기로 툭툭 턴다. 엎어진 박스 위에 몇 번을 더 내리친다,

깨 쏟아지는 소리가 신난다. 재미난 놀이처럼 마구 털어댄다.

 

시어머니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 동안 들깨 농사도 지어보았다.

큰 애가 들깨 모를 서너 개씩 알려준 간격대로 놓아주면 나는 빠른 호미질로 심어갔다.

가을이 되어 텃밭 한가운데에 멍석을 깔고 큰애와 작은애가 한아름씩 안아 옮겨주었다.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사진을 찍어 앨범 속에 끼워두었다.

사랑스러운 아들의 어린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그 생각을 하며 힘든 것도 잊고 들깨를 턴다.

언니의 속 있는 말에 맞장구도 빠지지 않는다.

남에게 해야 할 말도 모진 소리도 못 하는 언니를 보면 속상할 때가 있다.

싫은 소리해서 괜히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단다.

 

배 하나를  깎아 새참을 먹는다. 냉동실에서 꺼내 온 영양 찰떡이 먹기 좋게 녹았다.

따스한 햇볕과 바람결에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긴다. 잠깐의 휴식이 달콤하다.

 

금방 끝날 거라고 했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갈퀴로 마른 검불을 솔솔 털어내며 걷어낸다.

망사 멍석을 들자, 아래로 들깨가 물 빠지 듯 쏟아진다.

키질은 언니나 나나 아직은 서툴다. 때마침 부는 바람을 들인다.

동글동글 까만 알갱이가 수북하게 쌓인다. 손길이 더 바빠진다.

슬슬 손가락도 아파지고 그만하고 싶을 때쯤 일이 끝났다.

들깨 양이 제법 나왔다. 여름 장마만 아니었어도 더 많이 나왔을 거라며 아쉬워한다.

가을 하늘 아래 자매가 가까이 살아서 이렇게 좋다. 언니는 내 얼굴에 깨알 점이 붙었다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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