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담다

나의 사십대를 채운 정보화마을을 떠나며.....

LO송이VE 2020. 1. 16. 05:31

13년이란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홈페이지가 사라졌다

정해진 날짜에 폐쇄 한다는 안내 팝업창이 떴지만

무심히 지나쳤다.

크게 마음 쓰지 않다가 막상 닥치니 가슴이 철렁했다

몹시 허둥거렸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 같아 허탈했다.

 

200735, 첫 출근을 했다.

꿈꾸듯 설레고 그만큼 걱정도 앞섰다.

남들처럼 다시 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결혼하고 큰 애 낳기 전까지 일을 했다.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며 살림만 하면서도 늘 일을 하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집안일은 자꾸만 게으름을 피웠다.

큰 애는 손을 잡고, 작은 애는 업고 다니며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

밖으로만 나가려고했다.

 

저녁마다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는 약속은 자격증만 취득하고

무늬만 한식조리사였다.

몇 개월 다닌 미용학원은 실기시험에 한번 떨어지고 돈은 돈대로 쓰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 아이에게 영어도 직접 가르쳐 보겠다는 다짐으로 영어 지도사에도

도전했다가 나만 즐기는 공부로 끝나고 말았다.

애 키우며 살림만 한다는 것이 우연한 자리에서 주눅 들게 했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척 남편은 애들이 어느 정도 크면 시간도 많고

그때 가서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고 집에 있기를 원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사는 마을 안에서 애들도 챙기고 틈틈이 살림까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한테 딱 맞춘 직장이었다.

 

일 년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럭저럭

시간만 때웠다.

직장 교육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똑 같이 다 따라 할 수 는 없었다.

소심한 성격은 늘 뒤에서 허둥대고 느렸다.

남들과 비교하며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았다.

누가 보면 별 거 아닌 일을 대단한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몇 년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재미가 생겼고 일이 주는 기쁨까지 느끼게 되었다.

상복도 기분 좋게 따라줬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엄마가 쓴 글을 읽더니 '우리 엄마 글 정말 잘 썼네' 하며 좋아하며

칭찬하던 말이 일하는 내내 힘이 되었다.

 

마을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마을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쓰게 되었다

글을 써 본적도 없었고 책을 많이 읽어본 적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한 글자, 한 줄을 쓰는 것도 어려웠다.

매일 마을일상을 사진과 함께 올렸던 이야기가 충분히 좋은 기사내용이라고 

용기를 주던 사람이 지금도 고맙다.

 

눈뜨고 잠들기 전까지 온통 내가 할 수 있는 일 생각뿐이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있으니 흙 만지며 사는 농가가 먼저였다.

내 일자리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으로 월급의 일부분을 아깝지 않게

일 하는 데에도 썼다.

스프링마냥 통통 튀며 지칠 줄 모르고 매일 신나는 기분이었다.

마을 어르신들과는 말벗이 되었고,주민들과는 가깝게 지냈다.

당연시 여기며 내 부모, 내 가족에게 쑥스럽고 서툴렀던 고마운 표현도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몇 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며 처음에는 나름 좋은 변화도 생겼다

해가 바뀔수록 새롭게 도전하고 나아지도록 움직여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멈추고 말았다.

생각만 하다 어영부영 시간을 때운 날은 지금도 부끄럽다.

결국 마을의 정보화마을 사업은 자립을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지난 13년의 시간을 뒤돌아본다.

나의 사십대는 정보화마을일을 하며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스스로 박수 칠 만큼 잘 한 일도 있었고,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해

후회스러운 일도 많다.

정보화마을이 맺어준 인연 또한 고맙고 감사하다

사람냄새가 나서 좋고 정도 들었다.



살아온 날을 보면 살아 갈 날이 보인다는 말을 자꾸만 되뇌어 본다.

이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을 채워줄 뭔가를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숨고르기 하듯 잠시 멈춰 서서 오십대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