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LO송이VE 2020. 2. 28. 07:23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위에서 듣던 마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맷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

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

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

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

각이다

그것도 안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

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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